지난해 9월 경기도의 한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크레인으로 자재를 인양하던 중 철제 계단이 탈락하면서 50대 근로자가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하청업체 소장에 이어, 원청사 소속 안전관리자까지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경찰 수사선에 오른 사실이 최근 확인되면서 안전보건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직접 시공을 지휘하지 않는 안전관리자도 형사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입니다.
1. "지도·조언"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관리자의 역할은 사업주·관리감독자에 대한 지도·조언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직접 지휘·명령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보여주듯, 수사·재판 단계에서는 직함이나 법상 역할 규정보다 현장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관여했는가가 우선 검토됩니다. 위험작업을 사전에 인지했는지, 위험성평가나 작업계획서 검토 과정에 실제로 참여했는지, 위험을 지적할 기회와 권한이 있었는지가 쟁점이 됩니다.
2. 구두 경고는 법정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위험을 발견하고 현장에 구두로 전달했더라도, 그 사실을 입증할 기록이 없다면 수사기관 앞에서는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다음 항목은 반드시 문서·메신저·안전관리 시스템으로 남겨야 합니다.
- 위험성평가 결과 및 부적합 통보 내역
- 현장에 전달한 개선 권고 사항과 전달 일시
- 크레인 인양 등 위험작업의 작업계획서 검토 여부
- TBM(Tool Box Meeting)에서 전달한 위험 요인과 참석자 서명
- 위험구간 출입 통제 지시 및 실제 이행 여부
"했다"가 아니라 "했다는 증거"가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3. 개선 권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가 더 중요합니다
위험을 지적했음에도 사업주나 안전보건관리책임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사실 자체를 문서로 남기고 상위 결재선에 보고한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지적했으나 묵살당했다는 기록은 역설적으로 안전관리자 본인을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구두로 전달하고 넘어가는 대신, 공문·이메일·사내 시스템 등 기록이 남는 채널을 통해 개선을 요구하고, 반영되지 않으면 재차 상위에 보고하는 절차를 습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4. 권한 없이 책임만 지는 구조적 문제
산업안전보건법은 안전관리자를 경영진에 대한 참모 역할로 설계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지휘관에 준하는 역할과 책임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질적인 권한 없이 책임만 커지는 구조에서 일하는 안전관리자에게 이런 사건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구조적 간극은 안전보건 업계가 오래전부터 지적해 온 문제이며, 이번 사건의 수사·재판 결과가 실질적 관여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가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5. 지금 점검해야 할 것 — SFK 체크리스트
- 최근 3개월간 실시한 위험성평가 결과가 문서로 남아 있고, 관련자에게 공유된 기록이 있는가
- 현장에 전달한 개선 권고 사항이 구두로만 그치지 않고 공문·메신저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 크레인 인양, 고소작업 등 중대 위험작업의 작업계획서 검토 이력이 남아 있는가
- TBM 실시 기록과 참석자 확인(서명 등)이 누락 없이 관리되고 있는가
- 개선 권고가 반영되지 않았을 때, 이를 상위 결재선에 보고한 이력이 있는가
- 안전관리자의 권한과 책임 범위가 사내 규정에 명확히 정의되어 있는가
6. 외부 전문기관 위탁이 실질적인 방어선이 되는 이유
안전관리 업무를 전문기관에 위탁하면, 위험성평가·개선 권고·점검 이력이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문서화되어 남습니다. 사고 발생 시 "지적했다는 기록", "점검했다는 증거"를 갖추는 일이 담당자 개인의 부지런함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실질적인 권한이 부족한 구조 속에서 일하는 안전관리자일수록, 기록을 남기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곧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자료: 김희경, 「안전관리자도 '업무상 과실치사' 대상… 시흥 거북섬 원청 안전관리자 입건이 던진 질문」,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2026.04.04)를 바탕으로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