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건설안전 관련 핵심 법령인 산업안전보건법과 건설기술진흥법은 시공자(사업주) 중심의 안전관리 체계로 발전해왔습니다. 하지만 건설사고의 원인은 발주자·설계자·시공자·근로자 등 다양한 참여자에게서 비롯되며, 계획·설계 단계의 잘못된 결정이 시공 단계의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1994년부터 건설사업 주요 참여자의 안전관리 역할과 책임 분담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온 영국의 CDM 제도(Construction Design and Management Regulation)를 통해, 국내 협력적 안전관리체계 구축에 참고할 지점을 짚어봤습니다.
1. 유럽연합 건설업 개별지침에서 출발
영국 CDM 제도는 유럽연합(당시 유럽경제공동체)이 1992년 합의한 건설업 개별지침(Directive 92/57/EEC)의 원칙을 담은 영국 산업안전보건법의 하위법령입니다. 유럽경제공동체는 건설현장 사고의 절반 이상이 사업 준비단계의 부적절한 결정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사업을 준비단계(Project preparation stage)와 이행단계(Project execution stage)로 나눠 각 단계별 참여자 역할을 규정하는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발주자(Client)·사업 감독자(Project supervisor)·안전보건 조정자(Coordinator for safety and health) 등, 기존 산업안전보건 기본지침에는 없던 건설업 특유의 참여자 개념을 별도로 정의한 것이 특징입니다. 당시 유럽연합 15개 회원국은 1994년 말까지 이 지침을 국내법으로 전환해야 했고, 영국은 이를 CDM 제도로 반영했습니다.
2. CDM 1994 — 시공 이전단계로 책임 범위 확장
1994년 12월 제정, 1995년 3월 시행된 CDM 1994는 기존에 시공단계의 고용주·근로자 관계만 다루던 산업안전보건법의 범위를, 시공 이전단계까지 넓혔습니다.
- 발주자에게는 경쟁력 있는(Competent) 계약자를 선정할 의무를 부여
- 설계자에게는 위험요소를 최소화한 설계도서를 작성할 의무를 부여
- 시공 이전단계는 안전계획감독자(Planning Supervisor)가, 시공단계는 원도급자(Principal Contractor)가 총괄책임을 지는 이원 체계 마련
- 안전보건계획(Health and Safety Plan)·안전보건대장(Health and Safety File) 작성·확인 역할을 참여자별로 명시
다만 CDM 1994는 발주자가 대리인(Agent)을 고용해 자신의 의무를 대신하게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는데, 이는 이후 개정에서 핵심적으로 손보게 되는 지점입니다.
3. CDM 2007 — 대리인을 통한 책임 전가 차단
CDM 1994 시행 이후에도 영국 건설산업 사망재해는 정부 기대만큼 줄지 않았습니다. 시행 이전(1985~1994년) 34.1% 감소했던 사고사망자 수가, 시행 이후(1995~2004년)에는 12.7% 감소에 그쳤고, 2000년에는 오히려 사망자 수가 105명으로 증가해 제도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영국 보건안전청(Health and Safety Executive)은 명료성(Clarity)·유연성(Flexibility)·서류 최소화(Minimizing paperwork)·통합(Integration)·역량평가 간소화(Simplifying competence assessment)라는 5가지 원칙을 담아 2007년 CDM 2007을 마련했습니다.
- 대리인을 통한 책임 전가 차단 — 발주자는 더 이상 대리인에게 의무를 넘길 수 없고, 계약자가 안전관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자원 등 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추가됨
- 시공 이전단계 안전관리 책임자 개편 — 안전계획감독자(Planning Supervisor)를 안전보건조정자(CDM-Coordinator)로 대체해, 시공 이전단계 다양한 계약자 간 협업을 유도하는 역할로 강화
- 제도 통합 — 시공 이전단계를 다루던 CDM 1994와 시공단계를 다루던 CHSW 1996(Construction Health, Safety and Welfare Regulation)을 하나로 통합해 사용자 편의성 제고
4. CDM 2015 — 소규모 발주자까지 확대, 협업 강조
2014년 건설산업자문위원회(CONIAC) 검토에서 CDM 2007은 CDM 1994보다 명료성·유연성은 개선됐지만, 복잡한 행정절차와 계약관계자 간 협업 부족은 여전히 과제로 지적됐습니다. 이를 보완해 2015년 1월 제정, 4월 시행된 CDM 2015의 핵심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적용 범위 확대 — CDM 2007에서 의무가 축소됐던 소규모 자체공사 발주자(Domestic Client)의 사업까지 모든 건설현장으로 확대
- 주설계자(Principal Designer) 도입 — CDM 2007의 안전보건조정자를, 발주자가 계약한 설계자 중에서 선정하는 주설계자로 대체. 시공 이전단계 안전보건관리를 총괄한다는 큰 틀은 유지하되, 주도급자(Principal Contractor)와의 협업 역할이 새롭게 추가됨
5. 30년에 걸친 변화가 보여주는 방향성
1994년 제정 이후 두 차례 개정을 거치며 CDM 제도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방향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 발주자 역할의 지속적 강화 — 계약자 선정·계획 확인만 하던 발주자가, 대리인을 통한 책임 전가가 막히고 계약자에게 안전관리 역량 발휘 환경을 제공할 의무까지 지게 됨
- 시공 이전단계 책임자의 역할 고도화 — 단순 계획서 작성(안전계획감독자)에서 참여자 간 역할 조정(안전보건조정자), 주도급자와의 협업(주설계자)까지 역할이 확장
- 제도의 일원화 — 시공 이전단계·시공단계로 나뉘어 있던 이원적 규제(CDM 1994 + CHSW 1996)를, 설계·시공 전 과정에 적용되는 단일 제도로 통합
즉, 영국은 시공자 중심이 아니라 발주자의 능동적 참여를 축으로 계획·설계 단계부터 사업 참여자 전원에게 안전보건관리 역할과 책임을 분담시키고, 협업을 제도적으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30년 가까이 제도를 다듬어왔습니다.
6. 국내 제도와 비교해볼 지점
국내 건설안전 제도는 여전히 시공단계의 시공자(특히 도급인)에게 의무와 책임이 집중된 구조입니다. 최근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발주자·설계자의 안전보건관리 역할이 일부 신설되긴 했지만, 도급인 의무가 동시에 더 강화되면서 큰 틀에서는 시공자 중심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건설사업이 계획-설계-시공-유지관리로 이어지는 프로세스이고, 계획·설계 단계의 결정이 시공·유지관리 단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공 이전단계부터 책임자를 선정하고 참여자별로 의무와 책임을 분담시키는 CDM 제도의 접근 방식은 국내 협력적 안전관리체계 논의에 참고할 만합니다.
자료: 최수영, 「영국 CDM 제도로 본 국내 협력적 안전관리체계 구축의 필요성」,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관리』 제21권 제4호(2020.08)를 바탕으로 재구성